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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에도 장은 서야 한다! 이형록의 《화첩》 이야기

복다미 2026. 6. 6. 09:15

“배달도 없고 쿠팡도 없던 시대, 눈길 뚫고 장 보러 간 사람들 이야기”

이형록의 《화첩》
이형록의 《화첩》

눈 오는 날에도 장은 서야 한다! 이형록의 《화첩》 이야기

민화를 보다 보면 가끔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 이형록(傳 李亨祿)의 《화첩》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눈이 저렇게 왔는데 왜 집에 안 있고 시장을 가는 거지?"

요즘 같으면 어떨까요?

눈이 조금만 와도 "오늘은 배달시켜 먹자"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배달 앱도 없고, 새벽 배송도 없고, 당연히 쿠폰도 없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직접 걸어서 장에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형록의 풍속화 속 사람들은 눈이 펑펑 내려도 황소를 끌고, 짐을 지고, 장터를 향해 묵묵히 걸어갑니다.

어찌 보면 대단하고, 또 어찌 보면 웃음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이형록의 《화첩》
이형록의 《화첩》

화원 집안의 금수저 화가

이형록은 1808년에 태어나 19세기에 활동했던 도화서 화원 출신 화가입니다.

그의 집안은 말 그대로 그림 명문가였습니다.

아버지도 화원,

삼촌도 화원,

사촌도 화원.

요즘으로 비유하면 할아버지는 사진작가, 아버지는 디자이너, 삼촌은 일러스트레이터, 사촌은 웹툰 작가인 셈입니다.

명절에 모이면 아마도

"요즘 붓은 어떤 걸 쓰냐?"

"먹은 어느 집 것이 좋냐?"

같은 이야기가 오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그림이 일상이었던 집안에서 자란 인물이 바로 이형록입니다.


이형록의 《화첩》
이형록의 《화첩》

이 화첩에는 다양한 풍속 장면들이 담겨 있습니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갈대밭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도 있고,

배를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도 있고,

눈 오는 날 주막에서 술 한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 유튜브 제목으로 바꾸면 아마 이럴 것입니다.

  • "강가에서 혼자 힐링하기"
  • "시골 브이로그"
  • "눈 오는 날 막걸리 먹방"
  • "시장 가는 길 현실 후기"

생각해 보면 사람 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화첩 속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설중향시도(雪中向市圖)》입니다.

쉽게 말하면

"눈 오는 날 시장 가는 풍경"

입니다.

그림을 보면 새하얀 눈이 마을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황소를 앞세우고 줄지어 시장으로 향합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동네 단체 채팅방에서

"오늘 장날인데 가실 분?"

이라고 올렸더니

전원이 참석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게다가 사람들 표정을 상상하다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이 날씨에 꼭 가야 하나?"

"가야지, 집에 간장이 떨어졌잖아."

"눈이 너무 많이 왔는데?"

"그래도 장은 서니까."

아마 이런 대화가 오갔을지도 모릅니다.

이형록의 《화첩》
이형록의 《화첩》

황소가 사실상 오늘의 주인공

《설중향시도》를 보다 보면 진짜 열심히 일하는 존재가 하나 보입니다.

바로 황소입니다.

사람들은 두툼하게 입고 걸어가지만,

황소는 묵묵히 앞장서서 길을 엽니다.

어쩌면 그림 속 황소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님, 다음에는 눈 안 오는 날 가시면 안 됩니까?"

하지만 황소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실함을 보여주며 시장길을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저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사람보다 황소에게 먼저 눈길이 갑니다.


이형록의 솜씨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가로서 이형록의 실력도 상당합니다.

눈 덮인 겨울 풍경을 표현한 넓은 공간감,

짙고 옅은 먹색의 변화,

청색과 주황색이 만들어내는 색채 대비는 그림에 생동감을 줍니다.

특히 나무 표현은 마치 김홍도의 그림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힘이 있습니다.

눈 위를 걷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행렬의 흐름도 자연스럽습니다.

덕분에 정지된 그림인데도 금방이라도 사람들이 걸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성실함에 감탄했습니다.

눈이 와도 장을 가고,

추워도 일을 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직접 움직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림 속 풍경은 이상하게 따뜻합니다.

아마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집 앞까지 물건이 옵니다.

하지만 《설중향시도》를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천천히 걸어가며 만나는 풍경도 나쁘지 않겠다."

물론 눈 오는 날 시장까지 걸어가라고 하면 저는 여전히 배달을 선택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형록의 《화첩》은 단순한 옛 그림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과 웃음, 그리고 삶의 온도를 담아낸 따뜻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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