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던지고 탈출한 오후
화실 구석에서 며칠째 멍하니 앉아 분채 가루나 개고 있으려니, 슬슬 머리에서 쥐가 나기 시작했다. 선(線) 하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작업실을 탈출하지 않으면 조만간 붓을 부러뜨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어제 오후, 무작정 슬리퍼를 끌고 작업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목적지는 요즘 상하이에서 그렇게 핫하다는 판룽 띠엔띠(Panlong Tiandi / 蟠龙天地).
"그냥 커피나 한잔 때리고 오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참 직업병이 무섭다. 화가는 어딜 가나 사방이 다 캔버스로 보이고, 인테리어가 다 오브제로 보이니까. 잠시 머리 식히러 갔다가 오히려 뇌가 팽팽 돌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받고 돌아온, 지극히 주관적이고 흥미진진했던 어제의 '돌발 외출기'를 풀어본다.
어라? 이거 완전 ‘힙’하게 바뀐 조선시대잖아?
판룽 띠엔띠에 도착하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여긴 쉽게 말해 ‘전통 수향마을’과 ‘강남역 뒷골목’을 비빔밥처럼 비벼놓은 곳이다. 수백 년 된 오래된 옛집들의 거칠고 시커먼 기와지붕 아래로, 번쩍번쩍한 통유리창과 세련된 로고를 단 유명 브랜드 매장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 풍경을 보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화판 위에서 맨날 대가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전통의 현대화’가 눈앞에 거대하게 실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 시대 선비가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와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빨며 걸어 다닌다면 딱 이런 느낌일까? 옛것의 투박함과 새것의 매끄러움이 어우러진 컬러 조합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아키텍처의 센스에 ‘올ㅋ’ 하며 감탄했다.

명품 매장 사이에서 물귀신(?) 찾기
물길을 따라 걷다 보니 인스타 감성이 폭발하는 트렌디한 편집숍과 카페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 변태적인 작가적 시선은 자꾸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매끄럽게 잘 닦인 아스팔트나 화려한 간판 대신, 디자이너들이 일부러 남겨놓은 옛 건물 벽면의 거친 균열과 이끼 낀 돌다리에 자꾸 눈길이 갔다.
이곳을 채운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예쁜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느라 바빴지만, 내 머릿속엔 자꾸 옛날이야기가 맴돌았다. ‘수백 년 전 이곳에서 빨래하던 아낙네들과 배를 띄우던 사공들이 지금 이 풍경을 보면 기절초풍하겠지?’ 싶었다.
내가 그리는 책거리 속 기물들이 저마다 ‘나 여기 살아있소!’ 하고 말을 걸듯, 판룽 띠엔띠의 늙은 돌벽들도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야, 새것만 번지르르한 건 재미없어. 우리처럼 흉터도 좀 있고 찌들은 멋이 있어야 진짜지!”라고 말이다. 역시 낡은 것에는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기묘한 마력이 있다.

물 위에 스며든 ‘돈의 맛’과 힐링
해가 지기 시작하자 판룽 띠엔띠의 진짜 쇼타임이 시작됐다. 건물의 주황색 조명들이 일제히 켜지며 수로 위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 풍경이 기가 막혔다. 마치 캔버스 위에 주황색과 노란색 물감을 듬뿍 묻혀 물로 잔뜩 번지게 한 ‘물맛 좋은’ 수채화 한 점을 보는 듯했다. 자본주의의 자본이 만들어낸 완벽한 조명 기술인데, 묘하게 동양적인 서정성이 흘러넘쳤다.
더 재밌는 건, 이곳이 엄청난 자본이 들어간 상업 공간인데도 이상하게 사람을 급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쁘게 치이던 도심 한복판인데, 여기 오니 사람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멍하니 물멍을 때리거나 느긋하게 노가리를 까고 있었다.
그 느긋한 풍경을 보며 또 혼자 진지해졌다. 내 그림도 이 공간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세련됐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노곤노곤해지면서 쉴 틈을 주는 그런 그림. ‘음, 다음 책거리 작업엔 스타벅스 컵이라도 하나 슬쩍 그려 넣어 볼까?’ 하는 발칙한 아이디어도 샘솟았다.

붓을 다시 잡게 만드는 뽈뽈거림의 미학
어제 잠깐 다녀온 판룽 띠엔띠는 말 그대로 나에게 거대한 ‘영감의 종합선물세트’였다. 방구석에 처박혀 책가도 도록만 파먹고 있을 때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살아있는 아이디어들이 골목길을 한 바퀴 돌고 나니 머릿속에 가득 찼다. 전통을 박물관 유리창 안에 가두지 않고, 오늘날 우리의 힙한 일상으로 끌고 나오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온 느낌이다.
역마살 낀 예술가처럼 길거리에서 얻은 이 힙하고 신선한 에너지를 고스란히 안고, 나는 오늘 다시 작업실 책상 앞에 앉는다. 뽈뽈거리며 돌아다닌 보람이 있게, 오늘 내 붓끝에서는 왠지 수향마을의 은은한 물빛과 트렌디한 도시의 향기가 동시에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역시 인생도 예술도, 가끔은 탈출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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