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익명'의 금손들이 찢어놓은 청나라판 콜라보 앨범

"이름이 없다고? 오히려 좋아! 베일에 싸인 청나라 ‘미스터리 서화첩’의 매력"
박물관에 가면 다들 '이름 있는' 거장들의 작품 앞만 서성거리곤 하죠? 하지만 진짜 고수들은 소장품 번호 '동원 2196'처럼 이름 없는 명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춥니다. 이 작품의 정식 명칭은 『필자미상 서화첩』. 쉽게 말해 "누가 그렸고 누가 썼는지 모르는 청나라 시대의 비밀 앨범"입니다.

세로 49.3cm, 가로 33.7cm로 요즘 노트북 크기보다 조금 큰 이 고급 비단(견본) 책자 안에는 무려 10폭의 그림과 10폭의 글씨가 세트로 묶여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사람이 대충 낙서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다면 완전히 경기도 오산입니다. 붉은 도장(인장)이 군데군데 찍혀 있는 것을 보면, 당대 내로라하는 컬렉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수집했던 '초특급 한정판 굿즈'였음이 분명하거든요! 퇴색이 심해서 글씨와 도장이 흐릿하지만, 그 흐릿함마저 요즘 유행하는 힙한 시티팝 감성의 '인스타 필터'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갈아 넣은 화가의 영혼과 천하제일 서예 대회가 만났을 때"
이 서화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청나라 시대판 쇼미더머니"입니다. 왜냐고요? 10폭의 글씨가 전부 서체가 다릅니다! 이건 한 사람이 쓴 게 아니라, 당시 글씨 좀 쓴다는 조선의 '한석봉' 같은 청나라의 서예 탑티어들이 모여 "내가 더 잘 쓴다"라며 배틀을 벌인 흔적입니다.


그들이 쓴 내용은 또 얼마나 웅장한지 모릅니다. 도연명의 인생 로또 스토리인 『도원기(무릉도원 이야기)』부터, 서예계의 고트(GOAT) 왕희지가 쓴 레전드 명문 『난정 시서』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힙하고 핫했던 문장들이 총출동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다채로운 글씨들 옆에 있는 '10폭의 그림'은 놀랍게도 단 한 명의 화가가 다 그렸다는 점입니다. 서예가들은 여러 명이 와서 각자 자기 자랑을 하는데, 화가 혼자서 그 모든 분위기에 맞춰 배경화면을 깔아준 셈이죠. 비록 세월의 풍파를 맞아 색은 바랬지만, 돋보기를 들이대고 보면 소름 돋을 정도로 정교한 필치와 은은한 채색이 돋보입니다. 글의 소재가 된 중국의 명승지들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 담았는데, 이 정도면 청나라의 지독한 '디테일 광인'이 영혼을 갈아 넣은 게 확실합니다.

"세월도 막지 못한 청나라 '맑눈광' 예술가들의 타임캡슐"
비록 표지도 없고, 만든 이들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지만, 두께 1.4cm의 이 얇은 서화첩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름이 지워진 덕분에 우리는 선입견 없이 오롯이 선의 아름다움과 묵직한 먹향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세월이 흘러 채색은 바랬고 도장은 식별하기 어려워졌지만, 그들이 전하고자 했던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명문의 깊이는 2026년 지금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한구석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는 이 '미스터리 존잘러'들의 역작을 보며, 청나라 예술가들이 보낸 힙한 타임캡슐을 열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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